중국문화의 시원은 은나라와 주나라이다. 특히 중국 최초의 나라인 은殷나라는 산둥반도에서 일어난 동이족으로 우리나라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어서 주나라가 일어나는데 주나라는 이후 계속되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역사에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서는 왕실과 신하, 부모와 자식간 등 관계에서 모범적인 전거가 된다. 한 국가의 도읍의 배치나 군신관계에 관한 제도를 마련할 때에도 주례를 기준으로 설정된다. 따라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도읍과 제도와 아울러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발굴과정 등을 살펴보자.
은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은나라는 처음 탕湯임금이 세운 상商이라는 나라로 황하의 중하류에 지역인 지금의 산둥성 동쪽지방에서 허난성河南省 서쪽지방 일대를 차지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상나라는 서기 기원전 16세기에서 기원전 1027까지 존속하였다.
물론 상나라이전에 있었던 하夏나라도 역시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이 다스리던 나라도 중하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상商나라는 중간에 도읍을 5번째로 기원전 1300년전 은殷이라는 곳에 옮기면서 나라 이름도 ‘은殷’ 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상나라의 형세도
은나라란 30대 제신(紂王 BC 1046) 대에 와서 주에 멸망한다(하나라는 BC 2070 - BC 1600, 17대 걸왕이 마지막 왕). 은나라는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이 되나 주나라는 조상 제사를 지내라고 은나라의 미자微子에게 ‘송’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공자는 미자의 15대손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은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고 주는 華의 나라 은족은 흰옷을 숭상하였다 하였다.
이처럼 은나라는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이기도 한데 이는 은허에서 상투 유물이 발견되어 확인이 되었다.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인정하고 있다. 공자 역시 《공자세가公子世家》 등에서 자신이 은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은허에서 발견되는 갑골문자도 동이족이 만든 글자이다. 공자는 “난 은나라 사람이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에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서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은나라는 한자의 전신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만들고 청동기문화를 꽃을 피웠으며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화폐도 제조하여 사용할 정도로 수준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 중국의 문화중에서 가장 초기시대의 우수한 문화이다. 은허는 황하의 중, 하류지역에 위치하여 중국문화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은나라가 단지 전설상의 기록으로만 생각되었던 것이 호남성 안양현에 있는 은허에서 갑골이 발견되고 갑골에 새겨져 있는 갑골문자가 발견되게 되면서 은나라의 실체와 문자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였다.
중국의 문화의 원류라고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은나라도 동이족東夷族이고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공자도 동이족이었다. 그리고 은나라의 뒤를 이은 왕실의 전거로서 이용되는 주제도를 만든 주나라도 이민족이다.
주나라의 선조인 기 역시 융적이 사는 지방에 살다가 기산 북쪽에 자리를 잡아서 나라를 세우고, 8대째의 고공단보가 지금의 시안서쪽에 있는 곳으로 옮겨와 융적의 습속을 버리고 주나라를 발전시킨다. 중국은 계속 이민족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당나라 역시 선비족의 피를 수혈받아 한족화 하였다. 그 후에도 원나라나 청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은허에서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을 19세기말에서 10세기에 걸쳐 주구점원인周口店猿人발견, 둔황석굴敦煌石窟의 발견과 함께 3대 고고학적인 발견 중의 최고의 성과 중의 하나로 꼽는다.
왕의영‘갑골문자'임을 밝혀내다.
- 학질약으로 쓰는 용골이 은나라의 갑골문자임을 알아내다.
북경 청나라조정에서 국자감의 지금의 교장격인 제주祭酒 왕의영이라는 인물이 살았다. 그리고 왕의영이 정통유학을 하는 산동 북산(지금 연대시 복산구) 사람이다.
그는 광서제 25년인 1899년 가을 학질(말라리아병)에 걸려서 하인에게 달인당이라는 약방에 가서 약을 사오도록 심부름 보낸다. 그런데 하인이 사가지고 온 약재 중에서 용골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용골은 척추동물의 골격이었는데 그는 그 중의 하나를 우연히 보다가 약 웟면에 부호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대 금석문을 연구하던 왕의영은 이를 자세히 보니 그냥 단순히 새긴 흔적이 아니고 도안같이 생겼는데 고대의 문자같이 보였다.
그 글자의 형태가 대전大篆도 아니고 소전小篆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 하자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더 많은 용골을 찾아 나선다. 뼈조각 하나에 은 2냥이라는 고가를 주어 사들이는데 약방이 가지고 있는 부호가 있는 용골 전부를 매입하고 나중에는 골동품상 범유경을 통하여 사들이기 시작하여 전부 1,500여개 이상을 구입한다.
그는 이를 토대로 자세히 연구한 결과 이것은 용골?骨도 아니고 수천년 된 거북껍질과 야생동물의 뼈로서 거북껍질 뼈위에 새겨진 도안의 형태를 한 문자를 식별하는데. ‘日’, ‘月’, ‘山’, ‘水’ 등의 글자, 나중에는 상대商代의 몇 명의 국왕의 이름도 있는 것을 알아내서 갑골문 위에 새겨진 것이 고대글자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면 처음에 왕의영이 처음으로 밝혀내기 시작한 은나라의 문자가 새겨진 갑골이 어떻게 하여 시중의 약방에서 유통되기 시작하여 그가 입수하게 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발굴이 되었으며 발굴성과는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글은 주로 중국 관련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번역하여 주 내용으로 하였으며 국내의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혹시 내용 중에 번역상 오류가 있었을 수 있으니 잘못된 점이 있으면 수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성, 밭을 갈다 얻은 갑골을 약재 점포에 판매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갑골문이 새겨진 용골을 발견되게 되었고 용골이 약방에서 약재로 팔리게 되었을까? 처음에 용골이 발견되게 된 계기는 하남성 안양시 서북에 위치한 소둔촌 小屯村에 사는 한 농민이 밭을 가는데 이상하게 밭에서 오래된 것 같은 고대 갑골이 계속해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그는 전에도 경작을 하면서 자주 동으로 만든 동기, 옛날 돈, 옛날거울 등을 발굴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적이 있었다. 갑골이 약재로 사용되기 이전 중국 약재점포에 이를 맨 처음에 팔기 시작한 사람은 이성이라 부르는 이발사였다.
그는 처음 몸에 농창??을 앓았는데 가난하여 의원에 가서 약을 살 돈이 없어서 이 갑골을 갈아서 농창 위에 발랐다. 갑골은 밭에서 파낸 거북껍질인 귀갑龜甲과 소뼈인 우골牛骨이었는데 이를 환부 위에다 붙이자 흘러나온 고름을 뼈가루가 빨아 당기고 지혈이 되는 것을 알았다.
갈은 뼈를 칼로 다친 상처에도 바르면 아물었다. 그는 이에 착안하여 용골을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이름도 용골이라 붙이고 이를 약점포에 내다팔기 시작하였다. 용골은 학질 즉 말라리아묘약으로도 베이징 약방에서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빈궁한 농민들이 야생동물의 뼈나 갑골을 팔아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사방에서 이를 발굴하여 대부분의 약점포에서 용골이나 거북판 약재를 팔았다. 큰 갑골문자는 약상점에 가서 팔고 적은 갑골들은 말라붙은 우물을 메우는데 사용하였다. 이 용골은 처음에 1근에 몇 전만 주면 살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였다.
그런데 왕의영이 이를 구입하여 갑골문이 주나라의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뤄전위羅振玉, 왕궈웨이王國維 등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를 이어 받아 고증연구를 한 끝에 용골龍骨의 용도가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상商 왕조의 점술사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를 기록할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점을 쳐 갈라터진 무늬의 장단과 거칠고 세밀한지, 굽었는지 곧은지 등을 통해 길흉과 성패를 판단하고 점을 친 내용과 결과를 칼을 사용해 새긴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은 중국에서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문자형식이다. 이는 상형象形、지사指事, 회의?意, 형성形?、전주?注, 가차假借 등 글자를 만드는 밥벙이 성숙단계에 진입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용골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 영국, 일본 등 국내외에서 많이 찾게 되면서 용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하였다. 심할 경우 100배이상이나 비싸게 필려서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왕위영은 약포에서 구매한 갑골에서는 문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마을사람들이 갑골의 문자를 칼로 긁어낸 다음 약방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위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귀중한 보물을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둔촌에서 출토된 갑골문은 모두 상대商代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서 소둔촌은 작은 둔덕이라는 의미이다. 일찍이 상왕조 후기 때 도읍의 소재지였다.
기원전 16세기 전후 상商의 탕임금이 하나라를 멸한 다음 중원에 상나라를 세운다. 상商왕 반경?庚때 일찍이 은으로 천도해 주왕 때 나라가 망할 때까지 273년간 은이 계속 상왕조의 통치중심이 되어 왔다.
주나라가 상을 취한 이후에 은의 백성이 이곳에서 이주하면서 은의 도읍지는 다만 문자기록에서만 찾을 수 있었으나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게 제공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왕위영과 함께 갑골문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가 있는데 유악이었다. 유악은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용골을 수집하는데 글자가 없는 것은 사지 않았다. 그가 용골을 수집하자 후에는 일부러 글자를 새겨 넣어 팔러오는 경우도 있어 사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갑골문을 수집하는 과정 중인 1900년에 위화단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갑골문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갑골의 문자는 상나라시기의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1900년에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해 자희태후와 광서제가 시안으로 도망을 가서 1년동안을 보내는데 왕의영은 당시 경사단련대신의 명을 받아서 북경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는다.
7월 20일 침략군이 동편문으로 공격하여 들어오자 왕의영은 훈련병을 거느리고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북경은 점령이 된다. 그러자 그는 절명시를 남기고 집에 있는 우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한다.
이에 그의 아들이 그의 재산을 처분하자 유악은 갑골문 1천개를 사들여 연구를 계속하여 용골이 발굴된 곳이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기도 하나 그 역시 신강에 유배되었다가 죽는다. 왕의영의 집 고향 산동 연대시烟台市 복산구福山?에는 왕의영의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가 갑골문 해석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가 하던 갑골문에 대한 연구사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졌는데 그 중 한명이 나진옥이었다. 1908년 용골수집가인 나진옥羅振玉은 사람들을 시켜 용골의 출처를 조사하게 되었고, 드디어 원하洹河의 소둔小屯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진옥은 죽은 유악의 갑골문을 사들이고, 이를 추가로 수집하여 연구를 계속하였으나 그 역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마는데 그는 안양현 소둔촌을 은나라의 유적, 은허라고 생각을 하였다.
1915년 뤄전위가 샤오툰촌을 방문하여, 갑골 외에도 청동기·옥기 등을 입수하였다. 1928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의 역사어연구소가 둥쭤빈董作賓·리지李濟를 중심으로 샤오둔촌의 은허발굴을 실시한다. 발굴을 통하여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타난 은의 상나라(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 은허殷墟를 찾아낸다.
특히 완전한 갑골문자를 확인한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으로 현재 세계인구 중의 4분의 1이 사용한다. 은허 발굴은 2001년 중국이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굴’ 중 1위로 선정하고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36년에 12기의 왕릉과 2500여기의 제사갱, 부장묘가 발굴되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갑골전시관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 15만편 중 1936년 이 한 곳(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발굴된다. 확인된 15만 편 중에서 확인이 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고 있으나 해독된 글자는 2,500여자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로부터 1936년까지 15회 대발굴을 비롯해 1950년부터 1962년에 걸쳐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직도 넓은 유적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성과도 완전히 발표되지 않았다. 은허殷墟 유적의 규모는 원경이 36㎢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되어 있다.
2008년 10월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은허殷墟유적에서 은허발굴 8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내외의 학자 160여명이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은허발굴의 의의를 되돌아보고 발굴성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1호 궁전터는 이미 1999년 발굴뒤 막 확인된 제2호 궁전터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은(상)나라는 동이족의 일파라는 것이다. 고고학자인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하였고, 망한 뒤에 동북으로 되돌아갔다” 하였다. 2008년 발굴된 원북상성도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으로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한다.
이형구 교수도 “고구려·백제의 선조 부여도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도 은의 역법을 썼다”고 하였다.
갑골문자는 주나라에서도 복사卜辭에 이용되었다.
섬서성 기산현내에서 2조각의 주대의 갑골문자가 발견되는데 그 중에 55개의 문자가 새겨진 갑골이 발견되는데 이는 과거에 발견되지 않던 거북의 배 갑골甲骨이어서 세인의 관심을 끈다. 갑골문은 1899년에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감정한 사람은 금석학자인 왕의영이다.
그는 산동유현(지금 유방)의 골동품상 범유경으로부터 갑골을 구매하여 문자임을 알아낸다. 안양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은 중국밖의 학술대회에서 뜨거운 시선을 받기 시작한다.
1928년 5월까지 당시 전국의 최고과학연구기관 ‘중앙연구원’이 설립되고 몇 개가 더 설립된다. 그중에 역사언어연구소를 대표하는 중산대학문학원교수 교무장 부사년 傅斯年이 있는데 그는 임명후 바로 은허 갑골문에 주목해 8월 12일 중산대학부교수가 파견되고 34세 하남 남양인 동작빈董作?이 안양에 가서 조사를 진행한다.
동작빈은 갑골의 매장, 도굴된 상황과 진행할 만한 가치여부, 과학적인 발굴여부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여 소둔촌의 은허유지에 대한 발굴동의를 얻어낸다. 중국 정부는 1천원의 충분한 은화경비와 인력도 지원해 1928년 10월 7일부터 발굴을 개시한다.
이후 은허발굴은 15차에 걸쳐 발굴을 진행하여 궁묘와 능묘, 주거지역을 발견하여 이곳이 은나라의 수도라는 것을 밝혀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록하였던 은나라가 실재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성과가 있었다.
출토된 갑골 중에 글자가 있는 것은 24,918 조각이고 많은 다른 유물도 나왔다. 1950년 4월 13년간 중단되었던 은허발굴이 재개돼 1991년 10월까지 계속된다. 1973년에 소둔촌남쪽을 발굴하여 갑골위에 1만 조각을 얻어 가장 많은 발굴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1937년 6월까지 항일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 나자 이 갑골은 머나먼 피난과정을 떠나게 되고 그동안 연구사업도 오랫동안 중단과정을 겪게 된다. 전쟁이 나자 갑골들을 모두 모아 자동차등으로 운송을 하여 다행스럽게 전란이라는 어려움을 피해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갑골들은 당시 멀고도 먼 1천 ㎞나 되는 거리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많은 갑골들이 부서져서 훼손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어려움 끝에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홍콩에 겨우 도착하여 일본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영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자 홍콩도 일본에 점령을 당하였으나 갑골은 무사하였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48년 연구 성과가 발표된다.
은허에서 발굴된 복사卜辭는 동물의 뼈로 점을 치는 방법에 사용되던 것으로 거북 껍질이나 소의 견갑골을 모은 다음 모은 뼈를 톱으로 켜고, 연골 등을 제거하여 평평하게 다듬는다. 그 다음 뼈에 구멍을 뚫거나 끌질을 하고 상처를 낸 다음, 불에 태워 갈라지는 모습을 살핀다.
갈라진 모습을 조문兆紋이나 복조卜兆라고 하는데, 이 징조를 보고서 미래에 대한 길흉吉凶을 예상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친 다음에 그 내용을 뼈에 칼로 새겨서 넣는데 이러한 것이 갑골문甲骨文이다.
상나라의 사람들은 수시로 점을 쳤다. 점을 통하여 알아보려 했던 내용은 날씨, 농작물의 수확, 병이름, 사냥,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으며 갑골문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서주왕조에도 갑골문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1940년,《시경·대아·문왕지십·면》에 근거하여 섬서도 일찍이 갑골의 존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은나라 사람과 주나라 사람은 일찍이 서로 왕래를 많이 한 점에 비추어 미신인 점치는占卜 것도 문자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수경주水?注》에 근거하여 연구한 결과 고릉현高??서안부에 속함)뒷 부분에 8괘가 있는 옛 글자가 새겨진 거북을 발견한다. 이러한 갑골문은 반 이상이 주 민족의 것으로 50년대 초에 인정을 받았다.
1952년 하남 낙양현 동쪽 교외터에서 거북판이 발견되고 1954년 산서 홍조현방에 둔덕이 있는 마을에서 글자가 새겨진 점치던 뼈卜骨이 발견되면서 은나라 외에서도 갑골문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갑골문甲骨文은 점치는 내용에 따라 제사, 출입, 복있는 해, 수렵, 지명, 관명을 짓는데 이용되었다.
상당수가 주문왕, 주무왕, 주성왕시기의 것이고 극히 일부가 목왕때 것이다. 1991년 하북 형대邢台남쪽 연못의 서주의 터에서 1점의 글자가 새겨진 부스러진 복골卜骨조각이 발견되고,1996년 북경 방산현 연나라도읍지터에서 갑골 수10편이 발견된다. 그중 글자가 새겨진 것이 3조각이었다.
서주의 갑골지가 발견된 것이 9개소나 된다. 모두 312편에서 1,033자가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서주왕조의 터나 제후국의 터가 있던 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한자와 고대 양하류 유역의 설형문자로서 고고학적으로 표의문자이다. 한자의 원형으로 발전하여 자체를 따라 보면 고문자단계와 예·해단계로 볼 수 있다. 고문자는 상대부터 시작하여 갑골문이 대표적이나 진대에 가서 중단된다.
상대商代문자가 있고 서주의 춘추문자가 있으며 육국문자, 진계문자 등이 있다. 문자체계상으로 분류하면 갑골문, 금문金文, 도문陶文, 인장봉니문자印章封泥文字가 있다. 갑골문은 가장 초기 계통의 문자이고 고문자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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